보도자료
20170529 오마이뉴스_[헌법 쉽게 읽기 20]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 본 국민, 정당한 배상청구 가
2017/06/05   |   조회 :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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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활동 안 해 국민 피해, 책임지지 않는 국회의원


헌법 제1항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공무원 자신의 책임은 면제되지 아니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을 상상의 공동체라 표현한 이유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한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국가는 직접 일할 손이 없다. 그래서 국가는 공무원의 손을 빌려 나라를 운영한다. 공무원이 국가를 대신해서 국가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때문에 공무원이 공무수행 중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국가사무를 대신 처리하다 발생한 것이니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공무 중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공무원에게 지운다면 손해배상의 두려움에 위축되어 공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어려워질 우려도 크다. 반면 국가의 입장에서는 공무원이 한 일에 대해 지휘·감독 책임은 있지만 그 이상의 책임을 묻는다면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판례는 공무원의 과실의 정로를 나눔으로써 이 문제를 상당히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공무원의 과실여부를 판단하여 그 정도가 낮은 경우(경과실) 이를 국가기관의 행위로 판단하여 국가가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고 공무원이 고의로 손해를 입혔거나 과실의 정도가 높다면(중과실) 공무원 개인이 손해를 배상하도록 한 것이다(대법원 1996. 2. 15. 선고 95다38677 전원합의체 판결). 이에 더해 경과실이든 고의·중과실이든 우선적으로 국가가 배상하도록 하고 고의·중과실일 경우 국가가 지불한 배상금을 공무원에게 청구하도록 하여 국민을 두텁게 보호하고 있다. 일단 국가가 보상하고 필요하다면 해당 금액을 공무원으로부터 돌려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무원의 손해배상 책임에서 항상 비켜나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국회의원이다.

1951년 2월, 한국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던 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당해야 했고 후방에서는 빨치산의 공세가 강화되고 있었다. 국군은 인민군과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에 대비한다며 빨치산 소통작전에 돌입했다. 한국 정부는 서울 수복 직전 후방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담하기 위해 11사단을 창설하여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를 배속시킨바 있었다. 국군 11시단 9연대는 함양의 제1대대, 하동의 제2대대 그리고 거창의 제3대대가 빨치산을 토벌하면서 산청으로 집결하는 작전을 펼쳤다. 11사단 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이를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이라 명했다. 작전명 견벽청야는 이미 거창의 비극을 암시하고 있었다.

견벽청야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전술로 여포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이 전술을 사용했다. 여포는 조조가 쳐들어오자 들판의 곡식을 모두 수확한 후 성 안으로 들어가 성벽을 철저히 지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성 안에서 적군의 군량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즉,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군을 물리치는 전술이다. 사단장 최덕신은 지리산 일대 주민들이 빨치산의 보급로라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 거창학살사건 재판과정에서 9연대장 오익경은 예하부대장에게 하달한 작전명령(작명)부록에서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라고 명령하여 비전투원의 살해를 용인했으며, 재판석상에서도 "이적행위자를 발견시는 즉결하라는 지시를 하였"다고 시인했다. 그는 이적행위자란 "적에 가담되어 아군작전에 직접, 간접으로 (거슬리는) 행동하는 자"를 지칭한다고 설명하였으며, '미수복지대에도 양민이 있었지만 대대장에게 즉결처분 권한을 부여한 것'은 "조속한 시간 내에 공비를 완전 소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진실화해위원회, 함평 11사단 사건. 임영태의 '한국 현대사, 망각과의 투쟁' 참조).

1951년 2월 9일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가 신원면에서 빨치산과 교전을 벌이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대대장은 통비분자를 색출하다며 대현리, 중유리, 과정리, 와룡리에 있던 주민들을 남김없이 과정리의 신원국민학교로 집결시켰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빨치산 관련자들은 모두 도망간 후였다. 집결된 주민들은 모두 노약자나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군인들은 이들 가운데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 일부를 가려내고 나머지는 모두 박산골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골짜기로 밀어 넣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학살했다. 군인들은 산더미를 이룬 시체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뒤 돌아갔다.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학살된 인원만 693명이었다. 이른바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양민학살이 있은 지 한 달여 후 거창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신중목은 신원면에서 학살당한 이들은 빨치산이 아니라 양민이었다며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폭로했다. 곧 국회차원의 조사단이 꾸려졌다. 그러나 당시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를 공비로 위장시켜 조사단에 총격을 가하는 등 조사를 방해했다. 국군의 조직적인 조사방해에도국회는 재조사까지 진행하여 거창양민학살의 진상을 밝혀내고 말았다. 내무부·법무부·국방부 장관이 사임해야 했고 9연대장 오익균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는 무기징역형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에게는 3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특별사면으로 풀어주었다. 심지어 국회 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한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특채되기까지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1960년 5월 11일 거창양민학살사건 유가족 70여명이 사건 당시 주민 성분검사에 참관하여 학살을 방관했던 면장 박영보를 생화장을 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국회는 다시 진상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학살이 거창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인 함양·산청·문경·함평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밝혀졌지만 그에 따른 보상이나 사과 등 후속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30여년이 지나서야 1995년 12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손해배상 관련 규정은 없었다. 다시 10여년이 지난 2004년 3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금,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지급을 내용으로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까지 되었다. 이제야 피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고건은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피해보상은 다시 좌절 되었다.

그러자 유가족들은 국회의원에게는 양민학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을 규정한 법률을 제정할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방기하여 자신들에게 피해가 발생했으며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국회의원들에게 양민학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을 규정한 법률을 제정할 구체적인 입법의무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유족들의 청구를 기각하였다(대법원 2008.05.29. 선고 2004다33469 판결).

한국전쟁 전후시기에 상당히 많은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국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지만 보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피해자들은 이승만 정권과 이후 수십 년 이어진 군사정권에서 감히 국군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피해자들은 숨죽이며 수십 년을 살아야 했고 손해배상 청구권의 시효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국가의 잘못이 명백하고 피해자들의 손해도 명백했다. 

하지만 시효의 완성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방도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손해배상을 규정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법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국회의원에게 국민의 권익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면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개정할 입법의무도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입법의무에 반하여 입법을 하지 않아 국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회의원 역시 공무원이므로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공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국회의원들에게 구체적인 입법의무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비단 거창양민학살 사건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정쟁에 빠져 입법이라는 국회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국민과 언론은 이를 식물국회라며 비난한다. 그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 "시급한 민생법안"이다. 국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법안들이 국회의원들 간 정쟁으로 처리되지 못해 국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이마저 서로 상대 당의 잘못이라며 다시 정쟁으로 끌어들이고는 한다. 이렇듯 국회의원들이 본연의 임무인 입법활동을 하지 않아 국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헌법 제29조 제1항은 분명히 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명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회의원들의 구체적인 입법의무를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이후 2015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개정안이 다시 제출되었으나 국회 법사위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법사위에서 법률안 통과를 저지한 이는 얼마 전 1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받은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아직도 해당 법률안의 저지를 자신의 업적 중 하나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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